가해자인 두 여성 노동자는 50대로 강씨보다 경력이 훨씬 오래됐습니다. 이들은 회식 자리에서 강씨를 상대로 원하지 않는 신체 접촉을 하는가 하면, 회식 자리가 마무리된 이후 2차를 가자고 하여 강씨가 거부하자 "집에 가서 힘쓰지 말고 우리한테 힘을 쓰라"라고 성희롱했습니다.
이같은 피해사례를 두고 누군가는 그게 성희롱이냐고 의아해할지 모릅니다. 성희롱은 여성에 대해 남성이 저지르는 범죄 혹은 가해로 인식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나이와 근무 경력, 그리고 그 숫자에서 우위에 있는 두 여성 노동자가 관계의 열위에 있는 강씨에게 지위를 이용해 성적 굴욕감 또는 혐오감을 느끼게 하거나 성적 언동을 한 것도 '직장 내 성희롱'이 됩니다.
사실 노동 현장의 상담사례를 보면 직장 내 성희롱의 가해자가 남성이고 피해자는 여성인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위의 사례를 언급한 이유는 직장 내 성희롱이 본질적으로 직장에서 관계의 우위를 이용해 벌어지는 폭력이라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경기도의 한 체육단체는 직장 내 성희롱 문제로 난리가 났습니다. 해당 체육단체의 여성 팀장이 회식 자리에서 남성 팀원들을 상대로 부적절한 성적 발언을 한 행태가 방송을 통해 전국적으로 보도되었기 때문입니다. 가해자 팀장은 피해자인 하급직 남성 노동자들을 상대로 원하지 않는 신체 접촉을 하는가 하면 입에 담기 민망한 성적 농담을 하며 피해 노동자들에게 성적 수치심을 줬습니다.
가해자인 팀장은 회식 자리에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한 행동이었다며 성적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성희롱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앞서 강씨를 성희롱한 두 여성 노동자도 "조카 같은 강씨에게 전혀 성적 의도가 없었다"라고 펄쩍 뛰었습니다. 상담하다 보면 직장 내 성희롱 가해자들 대부분이 똑같이 말합니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이지요.
책임 회피하는 성희롱 가해자들
직장 내 성희롱으로 인정되는데 가해자의 의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피해 노동자가 성적 수치심을 느끼고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았으며, 성적 자기 결정권을 훼손당했는지 아닌지가 중요합니다.
자신의 인사고과를 평가하는 권한을 가진 팀장에게 잘 보이려고 아침 출근길에 웃으며 인사했는데 팀장이 '쟤가 나를 좋아하나!' 오해해 끈덕지게 술 한 잔 하자고 치근덕댄다면 고용관계에서 불가피하게 자신의 감정을 포장한 피해 노동자의 탓일까요? 남의 마음을 멋대로 해석하고 상대가 원하지 않는 부적절한 성적 발언과 접촉을 시도한 가해자의 탓일까요?
간혹 하급 남성 노동자가 여성 상급자에게 직장 내 성희롱 가해를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만 대부분 직장 내 성희롱의 가해자는 고용관계에서 우위에 있는 대표이사나 부서의 책임자인 상급자입니다.
고용관계에서 직장 내 성희롱 문제를 규율하는 법은 '남녀 고용 평등과 일·가정 양립 지원에 관한 법률'(이하 남녀고용평등법)인데요. 남녀고용평등법에 따르면 누구든지 직장 내 성희롱 발생 사실을 안 경우 그 사실을 사업주에게 신고할 수 있고(제14조 제1항), 신고를 받거나 직장 내 성희롱 발생 사실을 알게 된 사업주는 '지체 없이' 그 사실 확인을 위한 조사를 해야 합니다. 이에 더해 사업주는 피해를 입은 노동자나 피해를 주장하는 노동자가 조사 과정에서 성적 수치심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제 14조 제2항).
그러나 노동 현장에서 사업주의 남녀고용평등법상 의무가 제대로 지켜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앞서 성희롱 피해 노동자 강씨 사건을 조사한 회사는 강씨를 상대로 가해자인 여성 노동자에게 "혹시 호감을 표시한 적이 있었느냐"는 질문을 하는 등, 마치 피해 노동자가 직장 내 성희롱의 원인을 제공한 것처럼 전제하고 불쾌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사실 직장 내 성희롱 가해자에 대한 사업장 내부의 온정적 태도는 상급자라는 가해자의 고용관계상 위치에서 볼 때 필연적입니다. 가해자는 오랜 시간 사업주나 소속 노동자들과 업무적으로나 인간적으로 관계를 형성하였을 가능성이 큽니다. 사업주 처지에서 보면 가해자는 부서장이거나 팀장 등의 직책을 가지고 있는 내치기 아까운 관리자이지만 피해 노동자는 회사의 권력관계에서 가장 취약한 하급 노동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입 노동자나 인턴, 기간제나 아르바이트 노동자들이 직장 내 성희롱의 피해자가 되기 쉽습니다.
소속 노동자들의 평가에 따르면 앞서 사례로 제시한 경기도의 체육단체 성추행 사건의 가해자인 팀장은 선출직 임원인 회장을 제외하고 해당 기관에서 최고 권력자였습니다. 회장은 3년에 한 번씩 바뀌지만 실질적으로 예산의 집행과 인사관리를 담당하는 것은 가해자였던 팀장이었기 때문입니다.
피해자 보호 뒷전인 사업주
직장 내 성희롱 발생 사실을 인지하거나 신고를 받은 사업주가 지체 없이 사실관계를 조사하고 피해 노동자에 대한 보호조치를 하지 않으면 500만 원 이하의 과태료를 물릴 뿐입니다. 더욱이 남녀고용평등법에는 직장 내 성희롱 가해자가 사업주가 아닌 상급자나 동료 노동자일 경우 처벌 조항도 없습니다. 사업주가 직장 내 성희롱 행위자일 경우에만 고작 1000만 원 이하의 과태료에 처해집니다.
상급자나 동료 노동자가 직장 내 성희롱을 하면 성폭력처벌법상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추행으로 형사처벌을 할 수 있으나 이는 형사사건인 만큼 그 죄의 인정 요건이 엄격합니다. 가해자가 빠져나갈 구멍이 큰 겁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피해 노동자의 정신적 고통은 커져만 갑니다. 자신을 성적으로 대상화하여 음담패설을 늘어놓고 원하지 않은 신체 접촉을 하여 정신적 고통을 준 가해자와 한 공간에서 일을 해야 하는 겁니다. 상담하다 보면 무엇보다 가해자가 아무 일 없다는 듯 회사에 다니고 피해를 당한 자신이 주눅이 드는 현실에 피해 노동자들은 분통을 터뜨립니다.
관계의 우위에 있는 가해자는 상급자의 지위를 이용해 동료 노동자에게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해명하고 피해 노동자는 "웃음을 흘리고 다니며 처신을 잘못한" 사람으로 2차 가해에 노출됩니다. 심정적으로 피해 노동자를 지지하는 동료 노동자들도 가해 노동자의 눈치를 보며 지지를 표시하기 어려워지고 피해 노동자의 심리적 고립은 깊어 갑니다.
노동자와 근로계약을 맺은 사업주는 임금을 지급하는 의무 외에도 노동자가 안전하게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할 안전 배려의 의무도 집니다. 이를 위반해 노동자가 직장 내 성희롱 피해를 본다면 사용자의 의무를 다하지 못한 겁니다. 더욱이 안전배려의무가 있는 사업주가 성희롱한 경우라면 행정벌에 불과한 과태료가 아니라 엄격하게 형사처벌 해야 합니다.
입증이 까다로운 형법으로만 규율할 것이 아니라 근로기준법의 폭행죄 처벌 조항을 참고해 남녀고용평등법에 형사처벌 조항을 넣어 사용자에게 경각심을 주는 일이 어려운 일인지 묻고 싶습니다.
출처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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