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웨이퍼를 생산하는 업체에서 11여년간 일하다 혈액암에 걸려 사망한 근로자 유족에게 유족급여 등을 지급하지 않은 근로복지공단의 처분은 위법했다는 법원 판단이 나왔다.
23일 법조계에 따르면 서울행정법원 제3부(최수진 부장판사)는 A씨가 근로복지공단의 유족급여 및 장의비 부지급 처분을 취소해달라며 제기한 소송에서 지난 4월 18일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
A씨는 한 중소기업에서 2004년부터 2016년까지 반도체 웨이퍼 연마·세정 업무를 하다 2018년 사망한 B씨(사망 당시 44세)의 배우자다. 사망 진단서에 기록된 직접 사인은 폐렴, 선행 사인은 골수형성이상증후군(혈액암의 일종)이었다.
A씨는 B씨가 사업장에서 분산제, 불산, 이소프로필 알코올, 과산화수소 등 각종 유해 물질에 노출된 것이 발병의 원인이었다며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와 장의비 지급을 청구했다. 그러나 공단 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유해 물질의 양이나 노출 빈도가 높다고 보기 어렵고, 혈액암 발병과의 관련성에 대한 의학적 근거가 명확히 밝혀진 바 없다”며 급여 등을 지급하지 않았다. 이에 A씨는 공단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A씨는 B씨가 근무하던 사업장에 환기 시스템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았고, 개별 근로자에게 개인보호구도 제대로 지급되지 않았던 것이 발암의 직접 원인이었다고 주장했다. B씨가 일주일에 60시간씩 주·야간 교대로 근무하면서 비타민D 결핍, 심한 스트레스 등을 앓았다는 점도 근거로 제시했다.
산업재해보상보험법상 산업재해가 인정되려면 업무와 질병 사이에 인과관계가 있어야 한다.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 수행한 역학조사에 따르면 A씨가 근무하던 작업장에서 측정된 유해 물질의 양은 미미했다. 연구원은 “불검출 또는 노출 기준 미만 수준으로 이 사건 질병과의 연관성이 부족하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재판부는 “발병 원인과 메커니즘이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B씨는 해당 사업장에서 근무하는 동안 디클로로메탄을 포함한 다양한 유해 화학 물질, 극저주파전자기장, 주·야간 교대 근무 등 작업 환경상 유해 요소에 지속적·복합적으로 노출됐다”며 혈액암 발병과 업무 간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봤다.
일례로 디클로로메탄은 세계보건기구(WHO) 산하 국제암연구소(IARC)가 발암 물질로 분류했는데, 2003년 한때 B씨가 근무하던 사업장에서의 측정치는 노출 기준의 약 65%로 낮지 않은 수준이었다. 극저주파전자기장 역시 발암 물질로 분류되는데, B씨가 사업장에서 장기간 지속해서 노출돼 혈액암 발병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는 논리다.
B씨가 덴탈 마스크와 라텍스 장갑 외 적절한 보호구를 지급받지 못했다는 원고 측 주장도 받아들였다. 재판부는 “‘인산, 황산 등 약품 반응으로 호흡이 어렵고 눈을 제대로 뜨기 어려웠다’는 동료 근로자의 진술 등을 종합하면 B씨가 다양한 유해 화학 물질에 장기간 노출됐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판시했다.
교대 근무 역시 유해 요소였다고 재판부는 봤다. 재판부는 “주·야간 교대 근무는 취침 시간 불규칙, 수면 부족, 생체 리듬 혼란 등을 초래해 그 자체로 암 등 질병을 촉발한다고 알려져 있다”면서 B씨가 생전 교대 근무로 면역력이 저하된 상태에서 유해 물질에 노출돼 병력이 더욱 악화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했다. 이어 공단의 유족급여 등 부지급 처분을 취소했다.
장서우 기자 suwu@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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